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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른 세 살 신규간호사의 블로그
간호사가되겠다고?/4학년일기

처음과 마지막 시험에 대한 단상

by 애착인간 2021. 9. 25.

4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이 났다. 

아직 실습이 6주정도 남아있지만, 나의 3년간의 대학생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험이 끝나고나니 어김없이 열이나고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시험이 끝났으니 주말을 맞아 본가에 가려고 짐을 싸고 있는데 어쩐지 자꾸 땀이나고 얼굴이 화끈거려 열을 재 보니 38.2도다. 

38.2는 고열이 아닌데 역병이 창궐하는 이런 때에는 돌아다니기엔 충분히 민폐가 될 체온이다. 버스를 취소하고 방에 들어앉아 밀린 게임이나 해야지 하고 드러누워버렸다.

 

처음 편입을 하고 간호학과 2학년이 되었을 때 거짓말처럼 첫수업 첫시간부터 퀴즈(쪽지시험)를 봤다. 놀란 고양이처럼 온몸의 털을 세우고 두리번 거리고 있는 나와는 달리 다들 자연스럽게 시험지를 받아들고 슥슥 답을 써내려갔다.

 

아, 이게 간호학과였구나. 그때 깨달았던것 같다. 입학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경험했을 때 오는 두려움은 생전 처음 가는 외국에서 말 안통하는 택시기사가 갑자기 이상한 길로 가기 시작했을 때의 그것이었다. 

 

무조건 잘해야한다. 아니, 뒤쳐지면 안된다. 어떻게 하더라도 나이는 제일 많으면서 못하는 걸로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거지? 얼마나 공부하고 얼마나 노력해야 여기서 튀지 않게 묻혀갈 정도를 할 수 있는거지? 이 아이들은 평소에 얼마나 하고 있을까? 수능끝난지 1년이 조금 넘은 거니 머리도 좋을 텐데 나와 학습속도가 어느정도 다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방법은 일단 주어진 것들을 무리하게 완벽하게 머리에 넣는 일이었다. 그게 내가 중학교때 외고 입시에 실패한 이후로 한번도 해보지 않은 무모한 공부의 시작이었다. 

 

그게 3월 첫째주였을거다. 기본간호학교수님이 다음주에 퀴즈를 두개 본다는 예고를 하셨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나이많은 편입생의 첫 시험, 60명 한 반으로 이뤄진 작은 클래스에서 발버둥을 쳤다. 둘중 하나가 NANDA nursing diagnosis 라는 간호진단을 영문과 한글로 모두 외워서 보는 시험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잘 외워지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영어단어나 한자같은 짧은 단어의 단기암기능력이 좋은 편이어서 금방 외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예 이 간호진단 자체가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도 몰랐고 왜 이런 분류로 나뉘어져있는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어려웠다. 생소한 단어도 많고 서로 비슷비슷해서 내가 알고 있는 단어로 대충 끼워맞추는 식의 암기가 통하지 않았다. 주관식이었기 때문에 대충외울수도 없었기도 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때 처음으로 간호학과 입학하고 울었다. 이 시험 때문이 아니라 상황을 마침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내가 얼마나 낯선곳에 떨어져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되고 어떤 결과를 내야하는 지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아는 대학생활은 이런게 아닌데. 9년 전에 내가 겪었던 풋풋한 새내기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알아가고 능력있는 동기들과 교수님들에게 좋은 걸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싶었던 욕심은 점차 위축되는 자신감으로 변질되었다. 나말고 다른 편입생들은 안그러는 것 같다, 나만 이렇게 애쓰는 것 같다는 못난 자괴감도 더해졌었다. 

 

이후 시험은 무사히 지나갔고 그 후로도 일주일에 최소 한번은 퀴즈를 보는 간호학과 생활에도 많은 좋은 사람들로 인해 차차 적응도 하며 안정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2학년 1학기가 시간표도 여유있고 한가했던 생활이었는데. 그 빈 시간들로 인해 더 많이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것같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멍하니 나 자신을 걱정하는데 바빴다. 

 

모든 힘든 시간이 그랬듯이,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민했던 시간이 지나고 적응하고 나니 불안을 이겨냈다는 자신감과 함께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괜찮다. 버티기만 하면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 떨어진 성적을 극복하는데 3학년 한 해를 모두 쓰고도 모자랐지만, 뭐 어떤가.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고 성적표는 내가 게으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나만은 그 너머에서 잘했다고 말해줄 수 있다. 

 

타이레놀을 두 알을 꿀꺽하고 영화한편을 보고나면 열도 내려있겠지.